#5 _여행기
셋째날, 요상한 울릉도의 셋째날이 밝았다. 정말 이 날부터 울릉도의 요상함이 시작.
아침은 간단한게 김밥으로..나는 워낙 아침을 안먹는 체질이라 김밥 한줄 정도로 배를 채웠다.
무계획의 여행이기에 지도를 펴고 오늘 일정을 잡아보자고 축지법을 쓰시는 직원들이 근무하는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도를 폈다. 울릉도에도 두개의 둘레길이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걸어보자고 결정, 둘레길 입구까지 버스를 타고 들어가기로 했다.
역시나 버스를 우리가 전세낸 듯, 입구에서 내리는 사람도 우리 둘뿐, 내려서 조금 걷자 둘레길 입구의 간판이 보였다.
가다가 강아지 만나서 인사도 하고~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걷기 시작.
그러나 우리가 간과한게 있었으니 울릉도는 평지가 거의 없다는 이 사전지식!! 왜 그 때 생각하지 못했을지, 평지는 오직 나리분지 뿐이라는 걸. 그러니 결국 둘레길은 울릉도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한다는 것!!!
이건 둘레길이 아니라 둘레등반이었다. 시멘트 길인 이유가 있었다. 아무도 걸어올라가지 않고 차를 타고 올라간다는 거. 차를 타고 올라가는 관광버스의 관광객들은 우리를 흡사 미친사람처럼 보기 시작했고, 이미 시작한거 올라가지 않으면 끝낼 수도 없었다.
이 둘레길을 걸으며, 또 우리가 낚였다는 걸 알게되었다. 도민들이야 늘 걷는 길이라 이런 길이 마실나오는 수준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거의 김병만이 정글의 법칙에 상응하는 수준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건 그 둘레길을 걷는 사람이 우리 둘뿐이었다는 거. 유일하게 만난 4명의 울릉도민들이 지나가며 "관광 제대로 하시네요"의 말에 더 확신하게 되었다. 나중엔 아무 생각없이 발만 움직였다. 물한통도 가져오지 않아서 나중엔 점점 공포스러워 졌다. ㅠㅠ
둘레길을 따라 보이던 죽도, 우리는 나름 죽도도 가보자고 했었는데. 길을 걷는 동안 유선언니는 죽도를 보기만 해도 올릴 거 같다고 일정에서 죽도는 빼기로 했다. 걍 살기위해 우찌우찌 걸어가면서, 우리는 점심도 못먹고 이게 뭔짓인지.
아 진짜 이제 집들이 나오는구나. 이건 정말 전쟁포로가 도망치다가 마을을 발견한 느낌, 조난되었다가 구조당한 느낌. 그러나 이 마을에도 사람은 거의 없고 어쩌다 지나시는 아저씨 한분을 만났다. 우리가 버스정류장이 어디냐니까 저 언덕으로 한 십분 걸어가면 된다나. 또 시작된 울릉도민들의 축지법, 그냥 보이는 길만 걸어도 십분이겠구만, 그리곤 오토바이를 타고 "관광 잘 하세요오~" 이러고 떠나셨다.
그렇다. 아침에 먹은 김밥 한줄이 내가 오늘 먹은 음식의 전부, 전쟁같은 둘레길을 지나고 너무 배가 고파 산딸기를 따서 먹기시작, 지나다가 울릉도 산속에 공사한다고 나와있는 임시사무실에 들어가 물도 한잔 얻어먹고, 이거는 뭐 우리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
어마무지한 언덕을 지나고 지나 드디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 그런데! 그런데! 아까 그 오토바이 아저씨가 버스정류장에 오토바이를 탄 채로 버스시간표를 보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오기를 기다린듯이!!! 그 아저씨가 버스 시간이 한시간도 더 남았다며 그냥 저 밑에까지 걸어서 내려가라고 했다. 나는 믿을 수 없어서 버스시간을 확인하러 가고, 유선언니는 그 자리에 앉아서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 아저씨는 또 "관광 잘 하세요오~" 이럼서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가고. 이제는 나조차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겨우 살아온 전쟁포로에게 군대를 다시 가라고 하는 듯한 느낌..진짜 아 울릉도 진짜 뭐냐 이 사람들 진짜 왜이러냐 이런 생각, 정말 다들 짜고 우리한테 이러는 거 아니냐는 생각 뿐
이제 우리의 이성은 안드로메다로 떠났고, 그냥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양 걸어내려가기 시작, 어제 버스타고 올라왔던 이길을 이렇게 걸어서 내려가게 될 줄을 생각지 못했지. 인생사 한치 앞을 모르는 오묘한 진리를 이렇게 울릉도에서 깨닫게 되다니. 이제 다리는 내 것이 아니고 터벅터벅 내려가다 보니 어제 우리를 버스코스가 아닌 곳까지 태워주셨던 버스기사 아저씨가 버스를 타고 올라가시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가 내려오시면서 우리를 픽업을 해주셨다. 그리곤 한마디 " 너거 관광 제대로 하네" 아하하하하하하하. 그놈의 제대로 된 관광은 이런 것이구나.
그래도 그 아저씨 덕에 천부까지 우찌우찌 도착, 여기는 또 밥때만 밥을 파는 요상한 시스템, 겨우겨우 식당서 한끼를 얻어먹고 그리운 숙소로 고고
꼭 짠듯이 기다린듯이 우리가 나타나면 걸어라, 괜찮다, 잘한다 이런식으로 행군을 시킨 울릉도가 요상스러워서. 진짜 꼭 트루먼쇼 같은 기분이 들어서 숙소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처럼 축지법 울릉도민들을 만난 어떤 블로거의 글을 읽고서야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있었다. 블로거의 글이 아니었다면 이 울릉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며 과대 망상에 걸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동안 유선언니랑 나랑은 만나면 그 오토바이 아저씨의 "관광 잘 하세요오~"를 말하며 미친듯이 웃었었다.
관광 제대로 한 셋째날도 끝.